[편집인칼럼] 부활절을 맞아 안티기독교운동의 바람 앞에서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000인”의 영성을 가진 교회들이 일어서길!!

1973년 여의도 선교대회

1973년 여의도 선교대회에 운집한 100만여 명의 한국교회 성도들

1900년대 초반 부흥의 현장 평양 장대현 교회 (사진=한국교회사연구소)

1900년대 초반 부흥의 현장 평양 장대현 교회 (사진=한국교회사연구소)

부활절을 맞아 지난 1년을 되돌아본다. 어느 해보다도 안티기독운동이 거셌던 한 해였던 것 같다. 오늘 고난주간 일곱째 날 유월절 어린양의 희생 제물로 애굽의 속박으로부터 이스라엘 백성들을 해방시켰듯이 하나님의 본체이신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당신 스스로 인류의 속죄물이 되셔서 돌아가시고 지금 무덤에서 침묵하고 계시다.

안티기독운동의 정점은 사랑의 교회 담임목사계승문제가 법정으로까지 이어지고, 명성교회의 담임목사세습 문제가 겹치면서 교회 내의 갈등이 교계로 그러다 세간의 화제가 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되었다.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뉴스앤조이와 같은 기독언론들도 일조하고 동조 하였다.

세습에 의한 갈등은 한국교회 부흥의 주역들인 1세대에서 2세대로 이어가는 과정에서 교회공동체의 영적동의가 온전하게 이루어지지 않아서 발생한 파장이리라. 이 두 교회는 합동과 통합이라는 양대 교단의 대형교회들인 만큼 그 사회적 파장도 컸다. 설령 이 두 교회에 대해 한국교회공동체가 이해하고 용납하는 수순으로 마무리가 된다고 할지라도 한국교회는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다.

거기에 동성애에 대한 영적전쟁은 한국교회가 국민들로부터 이질적인 종교단체로 보는 시각들이 생겨날 정도의 이데올로기적 관심거리가 되었다. 또한 국민적 합의를 도출하지 못한 종교인과세 문제 등이 거론되면서 기독교를 이기적인 종교단체로 인식하기에 알맞은 환경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렇듯 한국교회에 대한 사회의 안티기독교 여론이 거세지기까지는 언론의 역할도 크게 한 몫을 담당했다. 세상언론들이야 특종을 만난 듯 기사를 내보내겠지만 문제는 기독언론이라고 표방하는 언론들이 맥락 없이 기독교 비판에 열을 올렸고, 자유주의 신학적 입장에 서있던 기독인들을 통해서도 스스로 교회공동체의 살들을 깎아 세상에 내어 주는 꼴이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언론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의 기독교가 부흥의 길을 가고 있는가? 쇠락의 길을 걷고 있는가? 이단은 성행하고, 이슬람은 이미 한국에 10여개 이상의 모스크를 지었고, 7개의 센터를 운영하고 있으며, 60여개 이상의 임시 예배소가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살리는 저널리즘은 과연 무엇일까?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내보내시면서 “너희는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마10;16]고 말씀하신 그 의미를 우리는 묵상해볼 필요가 있다. 즉 로마서 16:19에서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라고 사도 바울이 교훈한 것처럼 악한 세력으로부터 박해를 받을 때 악에 대해 실제적인 통찰력을 가짐과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처럼 간사하지 않는 선을 가지고 악을 이기라는 의미이가 아니겠는가?

지적하여 회개하도록 기회를 주고 바른길을 가도록 계도하는 것과 다시는 못 일어서도록 발가벗기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그것은 기독정론지가 가야할 길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달려 가야할 공동의 목표가 있다.

“바리새인들은 듣고 이르되 이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지 않고는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느니라 하거늘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시고 이르시되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질 것이요 스스로 분쟁하는 동네나 집마다 서지 못하리라 만일 사탄이 사탄을 쫓아내면 스스로 분쟁하는 것이니 그리하고야 어떻게 그의 나라가 서겠느냐 또 내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내면 너희의 아들들은 누구를 힘입어 쫓아내느냐 그러므로 그들이 너희의 재판관이 되리라”[마12:24~27]

즉 그리스도께서는 바리새인들이 시기와 질투에 눈이 멀어 그들과 그들 추종자들의 사역까지도 비난하는 꼴이 되는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시면서 역설적으로 귀신들도 자기들끼리 스스로 분쟁하면 존립근거가 사라진다는 것 정도는 알고 행동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선민이라고 표방하는 바리새인들 너희 스스로를 돌아보라는 비유로 말씀하신 것이리라.

다음은 국내의 전도와 해외 선교적 상황을 살펴보자! 7~8년 전만해도 전철 안에서 조용하게 전도하며 전도용 인쇄물을 내밀면 싫은 사람들도 받아서 옆으로 내려놓거나 아니면 반응을 하지 않고 무표정으로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요즘 지하철에서 전도를 했다가는 여기저기서 큰소리로 항의를 하고 심지어는 욕을 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이제는 아예 길거리 전도를 할 수 없는 환경으로 바뀌었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세상 언론은 종교영역에 가능한 깊은 개입을 꺼려하면서 짧은 사실 정도만 언급하는 기사를 썼다. 그러던 것이 기독언론을 표방하는 언론들이 몇 곳 생겨나면서 경쟁적으로 스스로를 드러내고 기독언론을 각자의 분쟁의 도구로 사용하여 서로 싸우는 모습을 보이면서 세상의 도마 위에 올려졌다.

과거 기독언론은 교단에서 1개정도 운영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기독언론들이 스스로 분쟁하고 사회적인 지탄의 대상이 되는 모습들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세상언론도 함께 매를 때리기 시작하였다.

지난 해 12월 27일자 국민일보에 실린 [허황된 가짜뉴스 프레임의 근원은 “뉴스앤조이”]기사에는 이런 언급이 있다. “박성제 자유와인권연구소 변호사는 “많은 사람들이 한겨레신문에서 ‘가짜뉴스 프레임’을 소개했기 때문에 그 근원이 한겨레신문이라고 생각한다.”면서 “하지만 가짜뉴스 프레임의 진짜 근원지는 뉴스앤조이였다. 한겨레신문이 ‘뉴스앤조이가 가짜뉴스로 판명한 주제를 근거로 기사를 작성했다’고 밝혔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라고 밝혔다.

어찌되었든지 뉴조가 기독정론지라고 표방하면서 그 존재의 의미는 안티기독교가 목적이었다면 온 국민과 성도를 속이는 사기극을 연출한 것이고, 겉도 속도 진정한 기독정론지라고 자부한다면 영적맥락이 없는 언론이리라. 12월 27일자 뉴스앤조이의 강도현 대표가 게재한 글 중 “<뉴스앤조이> 대표로 부임한 후, 지난 3년간 머릿속을 떠나지 않은 고민입니다. 지금까지는 생존 자체가 운동이었습니다. 교권과 금권에서 자유로운 개혁적 기독 언론으로 생존하는 것만으로도 의미가 있었죠. 그러나 2019년에도 생존 자체만으로 충분한 의미를 찾을 수 있을지 고민됩니다.” 그리고 중반부에 “3년 전 정말 뜬금없이 저를 <뉴스앤조이>로 보내신 하나님께 엎드렸습니다. 침묵 가운데 한 문장이 떠올랐습니다. ‘이제는 생존에서 존재로 나아가야 할 때다.'” 이렇게 글을 올렸다.

그러나 동성애동성혼반대국민연합과 동성애동성혼합법화반대전국교수연합(이하 동반연)에서 조사한 뉴조의 동반연 운동의 반대기사를 보면 [“뉴스앤조이의 이00 기자는 2018년 1년 동안 340여개의 기사를 작성하였는데, 그 중에서 동성애를 옹호하고, 동성애 반대활동을 비난하는 기사를 무려 87개를 작성하였다. 그 중에서 차별금지법 제정을 강력히 지지하고, 차별금지법 제정 반대를 비난하는 기사를 7개를 작성하였는데, 그 중에는 “차별금지법 제정이 성탄의 정신을 실현하는 것” 등이 있다.

또 동성애 퀴어행사를 적극 지지하고, 퀴어행사 반대 활동을 비난하는 기사를 7개를 작성하였는데, “인천퀴어 축제 참가자들, 신체적 정신적 피해 극심”, “반동성애 개신교인들, 또 퀴어축제 방해” 등의 기사를 작성하였다. 특히 이00 기자는 기독교 교단들로부터 이단으로 규정된 임보라 목사를 옹호하며, “백석대신, 통합, 임보라목사에게 사과하라”, “이단이라 흔들어도 사랑이 이긴다” 등의 기사를 7개 작성하였다.

또 한국교회의 동성애 반대 활동을 비난하는 기사를 14건이나 작성하였는데, “동성애가 무서운 교단들”, “보수 개신교회는 왜 동성애 혐오 최전선에 섰나”, “예장통합에 몰아치는 ‘반동성애’ 광풍” 등의 기사를 썼다. 뿐만 아니라 이00 기자는 지자체 인권조례 제정을 반대하거나 폐지 운동하는 것을 비난하는 기사를 15건 작성하였으며, 동성애를 반대하는 것을 차별과 혐오로 몰아가는 기사를 작성하였다.”] 등이다.

본 편집인도 지적한 바 있지만 이는 동반연의 활동을 반대하는 것을 넘어 활동가들을 아예 저격하는 수준이고, 동성애를 옹호하는 수준이다.

부활절을 맞이하여 기독정론이 걸어야 할 원칙들은 무엇일까 하고 스스로에게 자문해보고 또 기도해본다.

첫째, 기독정론지들이라 자부하는 언론들은 매를 때리되 사랑의 매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지적도 하시고 그 행위에 대하여 결론도 내리신다. 그러나 마귀를 쫒아내는 것 말고는 직접 징계까지는 내리시지 않으셨다. 여러 가지 요소를 묵상할 수 있겠지만 신학적으로는 십자가의 사명을 감당하시기 전에는 죄에 대한 심판의 권세를 부여받지 못함이시고, 영적으로는 인간의 죄 뒤에 똬리를 틀고 있는 사탄의 존재와 보혜사의 도움을 받지 못한 상태의 속에 있는 인간의 무력함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면서 회개의 기회도 주신 것이리라.

둘째, 시장경제의 원리인 수요와 공급, 투자와 효과의 원칙에 의해서 운영되는 언론사가 돼서는 안 되겠다. 급여를 주지말자는 것이 아니라 주는 급여에 비해 많은 업무와 효과를 바라는 경영원리를 적용하면 불필요한 기사를 쓰게 되고, 사족을 달아서 분란의 요소를 만드는 기사를 쓰게 되는 원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기사거리가 없으면 모여서 성경공부하고 전도하고 선교하는 언론사가 참 기독정론지가 아닐까라고 자문해본다. 기자들에게 급여를 통해서 한 가정이 경제적으로 평온하게 해주고픈 강대현대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그러나 독자들에게 기사의 논조를 맟추지 말고 ‘이 시대에 그리스도께서 한국교회에 바라시는 것들은 무엇일까?’ 기도하며 그것에 뉴스앤조이의 기사논조를 맞추면 안되는가? 이렇게 변화되었을 때 지금 후원하는 교회나 성도들보다 더 많은 후원과 격려가 뒤따르리라 여겨진다. 분열과 파괴는 사탄에게 먹이를 제공하는 것이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자. 그러나 이렇게 지원을 해도 또다시 영적맥락을 이해하지 못하고 주인을 향해 짖어대는 불충한 개에게는 더 이상 먹이를 줄 필요가 없다. 춥고 어두운 곳으로 쫒아내야 한다.

셋째, 한국교회의 역량을 서로를 감시하고 거룩한 척도를 잣대질하는 것으로 낭비하지 말고 질적 양적으로 주신 부흥의 열매를 선교의 사명을 감당하는데 사용하는 한국교회와 기독정론지가 되자. 설령 한 순간의 과오가 있다고 치자. 이에 대한 잘못을 인정하면 용서하고 주님의 나라에 새롭게 충성할 기회를 주어야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들이 묻기를 마지아니하는지라 이에 일어나 이르시되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 하시고 다시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땅에 쓰시니 그들이 이 말씀을 듣고 양심에 가책을 느껴 어른으로 시작하여 젊은이까지 하나씩 하나씩 나가고 오직 예수와 그 가운데 서있는 여자만 남았더라[요8:7~9]” 특정단체나 특정인을 우리 앞에 두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돌을 던지라고 말씀하실 때 의기양양하게 돌을 던질 자는 누구인가?

넷째, 모든 기사나 원고를 게재할 때는 그 논조의 잣대를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쓰고, 판단하여야 한다. 지난 번 좌파라고 비난 받는 것도 성경의 잣대가 아니라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사용하니 되돌아오는 부메랑 현상이다.

고난주간 여섯째 날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 속에서 피와 물까지 모두 쏟으시고 운명하시면서 7언을 남기셨는데 첫 번째 하셨던 말씀은 “아버지여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 : 34)이었다. 그리고 운명하셔서 지금 무덤 속에서 침묵시고 계신다.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았던 7000인이 존재했던 엘리야 시대처럼 어쩌면 교단이나 기독단체에서 정죄의 잣대를 세워 그 영적 정체성을 공표하기 전에 아니 공표하기 전 후를 떠나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영성을 지닌 7000교회들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으로 일어서기를 소망해본다.

[조옥환기자] 2019-04-20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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