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는 ‘죽느냐 사느냐’가 달린 긴박하고 처절한 싸움 (고후1:8-10)
교회 역사상 최초의 선교사는 안디옥 교회가 파송한 바나바와 바울입니다. 그들은 최초의 선교지인 구브로섬에 도착하여 선교 활동을 펼친 것입니다. 교회 설립의 가장 중요한 목적이 바로 선교라고 하는 것을 재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입니다.
그리고 선교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부여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세상 끝날 까지 선교하는 너희와 항상 함께 하시겠다’는 축복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세상에 당할 자가 없는 것입니다. 주는 자의 복이 임하는 것입니다.
물론 교회가 복 받기 위해서 선교를 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교회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서도 아닙니다. 오직 사도 바울과 같이 우리도 받은 은혜가 너무 크고 감사해서 주님께서 가장 원하시고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위해서 입니다.
오늘 선교가 안고 있는 몇 가지 중요한 점을 배우게 됩니다.
1. 선교의 시급성입니다.
구브로는 로마제국의 영토로서 로마 황제가 총독을 파송하여 총독 정치를 실시하고 있는 지방이었습니다. 총독들은 대개 폭정을 일삼아 왔습니다. 그러나 구브로 총독인 서기오 바울은 선량한 집정관이었으며, 진지한 구도자이기도 하였습니다.
바나바와 바울을 청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였으며, 그 말씀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 되었다는 사실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행13:7) 그때의 형편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기독교에 대한 로마의 핍박은 점점 심해지고 있는 때였습니다. 대부분의 핍박은 로마의 정치가들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니 일반 백성들 보다 정치가를 전도한다는 것은 호랑이를 정면에서 잡으려는 것처럼 힘들고 어리석은 일이 아닐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도 일반 정치가도 아니오 당시의 총독을 전도하였다는 것은 기적 중에 기적입니다. 고기 잡는 어부로 말하면 정말 대어를 낚은 셈입니다. 지도자 한 사람은 영향력이 큰 분이므로 이를 통해서 많은 사람을 전도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총독 서기오 바울이 전도 받기 전에 거기에 엘루마라 하는 마술사에게 현혹되어 있었습니다. 만일 바나바와 바울이 좀 더 일찍이 구브로에 갔더라면 서기오 바울의 심령은 좀 더 일찍이 눈을 뜨게 되었을 것입니다. 만의 하나라도 바울의 일행이 그곳에 가지 않았더라면 그 선량한 분이 복음을 들어보지도 못하고 사탄의 밥이 되어 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 있어서 우리는 선교가 지니고 있는 시급성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만일 이층집에 불이 났다고 합시다. 아래층에서 불길이 치솟아 이층으로 번져 올라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층 방에는 이것도 모르고 잠자고 있는 어린 아이 하나가 있습니다. 이 아이를 구출하기 위해서는 일분일초도 늦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교란 이와 꼭 같은 시급성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절벽으로 걸어가고 있는 어린아이를 구출해 내는 일과 같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미룰 수 없는 일이 바로 선교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선교의 시급성을 재발견할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혹시 우리 교회의 형편이나 다른 어떤 이유 때문에 전도가 지체되므로 억울한 희생자가 생긴다면 이것은 하나님의 뜻을 크게 위배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교란 준비해서 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바로 해야 할 일이 선교요, 전도입니다. 불난 집에 어린아이를 구출하는 일과 같은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선교는 항상 해야 할 일이지 내일 해야 할 일이 아님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2. 선교의 전투성입니다.
선교는 전투와 같은 것입니다. 도전해 오는 원수와 맞서 싸우는 전면전이라고 하기보다는 지금 포로로 잡혀갔던가, 적에게 포위되어 있는 아군을 적지에서 구출해 내는 특공대 작전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 똑같은 싸움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총독인 서기오 바울이 이미 사탄에게 포위되어 끌려가고 있는 신세였습니다. 그를 유혹하여 끌고 가고 있는 사탄의 앞잡이가 바로 ‘엘루마’라고 하는 박수였습니다.
이 사탄의 수중에서 구출해 내는 일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의 일행의 노고와 그를 마귀의 제물로 삼으려는 엘루마의 안간힘이 서로 불을 뿜어 대고 있는 것입니다.
과연 선교란 치열한 싸움이란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전쟁입니다. ‘이기느냐 지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입니다. 한 조각의 영토를 ‘얻느냐 잃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한 생명이 ‘사느냐 죽느냐’의 절박한 싸움인 것입니다.
선교는 결코 여유가 있어서 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의 긴박하고, 처절한 싸움인 것입니다. 여러분! 전쟁이 일어나면 만사를 중단하고 싸워야 합니다. 공부도, 사업도, 모든 공공 기관의 업무도 다 중단되는 것입니다. 온 국민은 오직 전투에 총 동원되는데, 청년들은 모두가 나아가서 싸워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쟁입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고후1:8-9)
이 말은 사도 바울이 선교하다가 겪은 것을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알린 것입니다. 선교란 그렇게 쉽지 않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모르기를 원치 않는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어려운가 하면 힘에 겨운 심한 고생이 있고 심지어는 살 소망까지 끊어지는 일까지 일어난다는 말입니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선교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선교란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것이요 생명의 위험이 따르는 일이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적극적으로 더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즘 우리 국민들, 심지어는 우리 믿는 사람들 사이에도 이렇게 힘든 선교를 꼭 해야 하는가 하는 소극적인 견해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특별히 그 비싼 돈 들여서 그렇게 위험한 지역에까지 가서 선교를 할 필요가 있냐고 묻는다면 거기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아시아에서 당한 환난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힘에 겹도록 심한 고생을 당하여 살 소망까지 끊어지고 우리는 우리 자신이 사형 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그가 이같이 큰 사망에서 우리를 건지셨고 또 건지실 것이며 이후에도 건지시기를 그에게 바라노라.”(고후1:8-10)
바울이 그런 환란에도 불구하고 계속 했더니 하나님께서 그 큰 사망에서 그를 건지셨고 또 앞으로도 건지실 것이라, 그뿐 아니라 그처럼 앞으로도 주의 복음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선교하는 선교사들을 하나님이 건지시리라는 말씀입니다. 아니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선교는 계속 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갈 때 한 말을 알고 있습니다. 그 당시 예언하던 사람들이 다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이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 올라가면 반드시 결박을 당하고 이방인의 손에 넘겨주게 될 것이니까 그 위험한 지역에는 가지 말라고 간청했을 때 그는 말하기를 “나는 주 예수의 이름을 위하여 결박당할 뿐 아니라 예루살렘에서 죽을 것도 각오하였노라”고 하면서 기어코 그 길을 갔습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은 그들의 말대로 붙잡혔고 로마로 송치되었으며 거기서 순교를 당했습니다. 우리도 때로는 주님을 위해서 복음을 위해서 위험을 각오하고 심지어는 죽어도 가야 합니다.
사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여 주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던 선교사님들도 그런 각오로 오신 분들입니다. 예를 들어, 토마스 선교사님 같은 분도 그가 이곳에 온다고 할 때 이웃들이 한사코 말렸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이 땅에 와서 결국은 발이 땅에 닫자마자 목 베임을 당하여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토마스 선교사와 같은 자기 목숨을 내어 놓는 모험과 각오가 있었기에 이 땅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해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만 의지하고, 자신을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오늘 말씀 9절에서도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게 하심이라.” 라고 합니다.
그러면, 마지막으로 이때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이겠습니까?
그것은 기도입니다. 여기 11절 말씀을 다시 읽어 봅시다.
“너희도 우리를 위하여 간구함으로 도우라 이는 우리가 많은 사람의 기도로 얻은 은사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우리를 위하여 감사하게 하려 함이라.”
모든 위험지역에 있는 선교사님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 특별히 그들의 안전을 위해서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해야 하겠습니다.
그것이 이 일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인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주님의 지상명령을 수용하기위해 주님의 교훈을 마음 깊이 간직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정만 목사 -성음교회 담임목사/8개교단 이단대책위원장협의회 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