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크로노스의 시간도 이제 보름 남짓 남았다. 사도요한께서 지적하신 말씀처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요일2:16]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에 팔려서 12개의 광주리에 담긴 30개의 보석들을 다 써버리고 이제 마지막 남은 광주리의 보석들을 바라본다. 먼저는 주님께 참으로 죄송스럽고, 그리고 최선을 다하지 못한 나 자신에게 매우 안타깝고 서운한 마음이 든다. 그러면서 문득 사사 삼손을 떠올린다.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고 헛된 삶을 보내다 결국 머리카락을 잘리고, 두 눈을 뽑힌 채 연자방아를 돌리는 짐승의 역할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난 삶을 회개한 후 최후의 삶을 바쳐서 사사의 사명을 감당하였다.
부족한 본인에게 미션투데이의 편집인 역할을 맡겨주신 하나님과 동역자들에게 감사드리며 이 칼럼을 통해서 앞으로 제가 감당할 사명과 역할에 대한 소신을 간략하게 피력하고자 한다.
첫째, 언론의 사명은 소금과 같다.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길거리에 버려진다. [마5:13] 성도들이 소금의 역할을 해야 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언론을 담당하는 성도들은 그 역할에 보다 더 충실해야 한다. 소금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마6:33] 말씀이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말씀에 의지하여 나아가고자 한다. 언론의 사명도 목적도 중요하지만 그 중심에 ‘주님의 나라의 확장과 영혼구원’이라는 주제가 녹아있지 않으면 짠 맛을 잃은 소금과 같다.
둘째, 언론인의 둘째 사명도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이다. 기사를 쓰는 자의 마음 중심에는 항상 주님의 대한 사랑과 충성이 흘러야 한다. 예수님의 형제인 야고보가 기록한 글에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냐.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냐 이와 같이 쓴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약3:11~12]고 했다. 편집장이 되었든, 기자가 되었든 그의 마음 밭에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넘쳐흘러야 한다. 그러나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함이 아니라 주님의 이름을 빌려 자신들의 야욕을 채우기에 급급한 삯꾼들의 내면에서는 결코 선한 열매가 맺힐 수 없다. 결코 쓴 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한다.
셋째, 기독언론인의 세 번째 사명도 역시 “먼저 주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이다. 기사를 탈고하고 온라인을 통해 송출할 때도 다시 한 번 이 기사가 세상에 나갔을 때 주님의 나라 확장과 택하신 백성들이 속히 주님께 돌아오는 일에 쓰임을 받을지, 혹 방해가 되지는 않는지 기도하며 내보내야 한다. 특히, 교회에 대한 기사와 성직자들에 대한 기사 그리고 성도들에 대한 기사를 다룰 때에는 마치 뇌수술을 하는 집도의의 심정으로 글을 쓰고 내보내야 할 것이다.
최근 뉴스앤조이와 크리스천투데이 간의 논쟁의 열기가 뜨겁다. 기사의 제목을 보면 각각 나름의 기사별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크투가 뉴조에게 던진 기사의 주된 논조는 “종북좌파가 기독언론 행세를 함에 대한 폭로”이다.
좌파는 종교를 인정하지 않는다. 그래서였을까? ‘교회 개혁’을 표방하는 뉴조의 기사들은 교회가 바른 길을 가도록 회초리를 대는 수준을 넘어선 아예 무너지라고 내리치는 채찍이었다. 그러면서 동성애자들에 대해서는 방패역할을 넘어 보호하고 있다는 느낌이 아예 노골적이다.
이번 사태를 기점으로 뉴조의 발행인과 편집인은 회개하여야 한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고 예수님이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말이다. 그리고 기사의 논조를 바꾸어야 한다. 죽어라고 내리치는 채찍이 아니라 사랑의 회초리로 “주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정문일침을 위하여 펜을 사용하여야 한다.
기독교가 없는 세상을 구현하고 싶으면 양의 탈을 벗어라. 그리고 아예 선전포고를 하고 싸워라! 장사에도 상도의가 있고, 전쟁에도 피아를 구분하며 때론 상대를 존중하며 싸울 줄 안다. 하물며 여호와의 이름으로 후원을 받아서 여호와의 사역을 방해한다면 이는 자손 대대로 징계 받아야 마땅한 행위이다.
그러나 본 기자가 보기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사회운동이 연합된 형태로 기독교정의를 실현하고자 하는 것이 뉴조의 기조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사역은 다양하게 전개될 수 있다. 그렇다고 그 다양성이 사역의 본질을 일탈해서는 안 된다.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하는 것”이다.
기독교역사를 보면 시작의 의도는 항상 나름의 인과관계가 있고, 당위성도 존재한다. 그러나 육적ㆍ영적으로 3차원적인 한계를 갖고 있는 나약한 인간은 결국에는 선악과까지도 손을 대고 마는 것이다. 이 불손종이 인간의 불행의 시작이다. 그래서 이단이 되고 실패한 기독운동이 되고 마는 것이다.
동성애와 동성결혼을 기독운동의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소수인권이라고 표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을 위하여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면서 결국은 동성혼을 비판하고 반대하는 기독운동을 죽어라고 때려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누구를 위한 기독운동이고 누가 슬퍼하고 누가 기뻐하겠는가? 동성애자들이 기뻐하고 동성애 반대자들이 슬퍼할까? 아니다. 사탄이 기뻐하고 하나님께서 슬퍼하신다.
레위기 18:22절에서 여자가 함께 하는 것처럼 남자는 남자와 성관계를 갖지 말라. 레위기 20:13절에도 여자가 여자와 같이 관계를 하는 것처럼 남자가 남자와 성관계를 하는 것은 가증스런 일이다. 그들은 반드시 죽을 것이다. 고린도전서 6:9-10절에도 불의한 자는 하늘나라를 상급으로 받지 못한다. 간음하는 자들, 우상숭배자들, 동성애하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 로마서 1:26-28절에도 남자와 여자가 같은 성을 가진 자들끼리 욕망을 품고 관계를 하는 것은 합당하지 못하다고 가르친다.
삼상15:3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말렉 사람들을 치되 남녀노소와 모든 소유를 남기지 말고 진멸할 것을 명하셨으나 사울은 자의적인 판단으로 아말렉왕 아각과 살찌고 기름진 우양을 남기고 진멸하였다. 이에 하나님께서 사울을 왕으로 삼은 것을 후회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이 사건을 통해서 회개하고 순종하라고 간청하는 사무엘의 충고도 무시하고 결국 사울은 하나님의 관심에서 멀어지게 되었다. 동성애에 대한 것도 성경에서 금하는 것이다. 이를 휴머니즘과 인권이라는 이름으로 감싸고 보호하여 반대론자들이 비판조차도 할 수 없도록 막아서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사역을 감당하는 자들이 아니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스스로 표방하는 자들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교회개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동생을 교육하는 형이 있다고 하자. 동생이 잘못을 저지르면 회초리를 댈 수 있다. 그것은 올바른 길을 가도록 계도하기 위함이다. 그러나 그 동생을 죽도록 패 버리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 감당은 어차피 아버지의 몫이다. 그래도 교훈을 받아들이지 못하면 더 중한 벌로 다스려야지 온 동네에 소문을 내고 발가벗겨서 내어 쫓아버리면 되겠는가?
세상의 언론의 방법과 관습을 우리가 따라가며 답습할 필요는 없다. 우리가 창조적으로 이끌어가야 한다. 우리는 영의 사람들이다. 세상을 바라보는 것도 실천하는 것도 우리가 끌어가야 한다. 선민사상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구별된 자이기 때문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이다.
[마16:2~3]에서 그리스도께서“저녁에 하늘이 붉으면 날이 좋겠다 하고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하시면서 날씨는 분별하면서 어찌 시대는 분별하지 못하느냐고 한탄하셨다.
현재 우리나라는 전도를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렀다. 그리고 방송에서 기독교적인 용어는 특정종교를 표방한다는 이유로 금지사항이 되어 버렸다. 머지않아 구역예배와 가정예배도 사라질 것이다. 찬송과 예배 드리는 소리는 이웃들에게 혐오스러운 행위라고 규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탄절이 다가온다. [눅2:14]“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서로 바라보며 비뚤어진 것은 바르게 고쳐주고, 그래도 고치지 못하면 사랑의 매를 때리는 아량도 갖추며 각자 자신의 사역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고 사람들 가운데서는 평화가 임하는 사역들이 되도록 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