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5일 현지시간 저녁 8시경, 수 백명의 위구르인들이 인민광장에 모여 무엇인가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다. 곧 경찰이 출동했고 강제진압이 시작됐다. 이 과정에서 주위에 있던 수 천명의 위구르인들도 시위에 동참하게 되면서 이 사건은 천안문사태 이후 최악의 유혈사태로 커지게 된다. 우루무치는 곧바로 사실상 계엄상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이 우루무치 사태에 관해서는 객관적인 자료를 얻기가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중국 정부가 사건이 발생하자마자 바로 외부세력의 개입을 막는다는 명목으로 모든 전화통신과 인터넷 및 문자 메시지까지 차단을 했기 때문이다. 우선 정부에서 발표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2009년 7월 5일 오후 6시20분쯤 위구르족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우루무치 동남부지역에서 가까운 인민광장에서 처음으로 시위가 시작됐다. 여기에 모인 위구르인 3,000여명은 지난달 26일 광둥(廣東)성 사오관(韶關)의 한 장난감 공장에서 발생한 한족과 위구르족 직공 간의 집단 패싸움 사건을 당시 경찰이 편파 수사를 했다며 항의했다. 시위대는 이어 주요 도로로 나가 버스와 택시 등에 불을 질렀고, 위구르 거주지역에서 가까운 한족 상가와 주택에도 방화했으며, 닥치는 대로 한족들을 죽였다. 중국 정부는 무장경찰과 장갑차량 등을 동원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신장위구르자치구의 주석인 누얼 바이커리(努爾 白克力)는 다음날 TV에 출연해 성명을 발표하고 이 사건이 외부 세력에 의해 계획된 국가 분열행위라고 규정하고 위구르 민족의 만행을 주로 담은 관련 동영상을 발표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이런 정부의 주장과는 다른 내용을 가진 증언들이 후에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목격자들은 시위가 처음에는 평화적으로 시작되었고 그 인원도 정부의 주장처럼 처음부터 3,000여명이 아닌 수 백명에 불과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경찰이 여의치 않자 소몰이용 전기 충격기를 동원했고, 이 과정에서 2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재일위구르연합회장 일람 마흐무트는 전했다. 사람에게 소몰이용 전기 충격기까지 사용하는 모습에 충격과 분노를 느낀 위구르인들이 강제 해산된 뒤 다시 집결하기 시작하여 대규모의 집단 폭력시위로 커지게 된 것이다. 이렇게 폭발된 위구르인들의 폭력시위는 주위의 한족들과 한족 상점들, 공공버스와 경찰이 주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불과 4시간 정도의 시위를 통해 정부 발표로 14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828여명이 부상했다. 이후 경찰의 대대적인 시위 참가자 색출 작업이 진행되었고, 이 과정에서 1,434여명이 체포되어 갔다.

사건의 전개 및 확산

7월 7일 약 500명의 위구르족 여성들이 지난밤 연행자들의 석방을 요구하며 기습 시위를 벌였다. 경찰은 당시 취재 중이던 외국 언론들을 의식하여 강경 진압을 자제하였다. 그러나 오후에는 위구르족들에게 분노한 약 300여명의 한족들이 복수라도 하는 듯 위구르족 상점들을 부수며 시위를 벌였고 잠시 후에 다시 3,000명의 한족이 각목, 쇠 파이프 등을 들고 반 위구르 시위에 나서 위구르족 주거구역 침입을 시도했다.

중국 정부는 우루무치에 2만여 명의 경찰병력을 동원하고 요소요소에 장갑차, 군용 트럭 등을 배치해 시내는 사실상 계엄상태가 되었으며, 이후 경찰과 군 병력이 계속 추가되었다. 그리고 또 다른 소요사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카쉬가르(喀什)나 호탄(和田), 이닝(伊寧) 같은 지역에 군대가 비밀리에 급파되었으며, 그곳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은 모두 안전한 호텔로 정부가 이동시켰다. 그 후 우루무치 사태는 정부의 강력한 통제에 의해 조금씩 진정되어 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지난 9월 초 우루무치에서는 일부 위구르인들이 병원에서 사용하고 폐기한 오염된 주사기로 한족들을 찌르는 이른바 ‘주사기 테러’가 발생했다. 한족 400여명이 위구르족에게 주사기 테러를 당했으며, 이에 분노한 한족들이 정부를 향해 안전보장을 외치며 시위를 벌였고 우루무치는 다시 긴장 상태에 빠졌다.

10월 1일에는 건국 60주년이라는 국가적 행사가 있기 때문에 정부는 서둘러 신장 지역을 안정화 시켜야 했다. 다행히 철저한 통제 아래 국경절 행사는 잘 치러졌지만, 국경절 연휴가 끝나는 10월 8일, 알-카에다 아프가니스탄 사령관으로 알려진 아부 야히야 알-리비는 7일 한 인터넷에 공개된 20분 분량의 동영상을 통해 신장위구르 자치구의 위구르족에게 억압적인 중국에 맞서 지하드(聖戰)을 전개하라고 촉구했다. 정부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고 있지 않지만, 내부적으로 특별히 신장지역을 더욱 통제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많은 전문가들은 신장 지역의 통신과 인터넷이 국경절 행사가 치러지고 난 뒤 정상화 될 것이라고 했지만, 현재까지도 여전히 불통이다.

우루무치 사태에 나타난 위구르 민족분쟁의 특징

첫째, 민족분쟁의 성격이 종교적 이유에서 경제적 이유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과거 위구르 민족분쟁의 원인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가장 중요했던 것이 종교적인 이유였다. 신장지역에서 일어났던 민족분쟁도 90년대 이전까지는 대부분 종교적인 이유로 일어났고 종교적 인물들이 앞장서서 주도했던 것이 대부분이다. 그런데 이것이 이번 우루무치 사태 때는 조금 다른 양상으로 나타났다. 바로 사회적, 경제적인 이유가 전면으로 부각된 것이다. 90년대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한 것에 영향을 받은 위구르인들은 독립에 대한 열망이 높아져 갔다. 이후 2000년대부터 시작된 서부 대개발로 인해 내지에서부터 한족들이 몰려옴으로 생기기 시작한 사회적 문제 즉 취업의 기회 축소, 상권의 잠식, 기득권 박탈, 상대적 빈곤감의 증가, 자원의 무분별한 이용과 환경의 파괴에 대한 위구르족들의 불안과 불만들이 이번 사건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던 것이다. 이번 사건에서 종교적인 색채가 그다지 강하지 않았다는 것은 정부가 이번 사태 이후 안전상의 이유로 이슬람 사원에서 금요일에 드리는 예배를 금지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강한 반발이 일어나지 않은 것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이번 사건은 피해 규모가 매우 크고 피해자의 대부분이 소수민족이 아닌 한족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정부는 이 사건을 “외부 세력의 조종과 선동 하에 내부 세력이 실행한 계획적이고 조직적인 폭력범죄”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위구르 민족과 해외의 위구르 독립운동 단체들은 이는 계획적인 것이 아닌 중국정부의 오랜 소수민족에 대한 차별정책이 빚은 결과가 폭발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정부의 입장을 그대로 믿기에는 초기 평화적 시위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영상과 맞지 않는 면이 있고, 위구르민족의 입장을 그대로 믿기에는 단시간에 너무도 많은 인명 피해가 났다는 것에서 설명이 어려운 부분이 있다. 필자는 이에 대해 정부측의 주장과 위구르 측 주장이 모두 일리가 있다는 주장환 교수(코리아연구원 기획위원/한신대 교수)의 의견에 공감한다. 위구르인들이 이렇게까지 분노가 폭발할 만큼 중국정부의 위구르 민족에 대한 정책은 만족스럽지 못했다. 최근 서부 대개발을 통해 일정 정도의 발전과 생활수준의 향상이 있었지만, 위구르인들에게 돌아가는 혜택은 미미 했으며 오히려 내지로부터 유입되는 한족으로 인해 그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정체성이 약화되는 결과가 되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신장지역의 경제적 발전이 위구르 민족에게는 2등 민족으로서의 고착화와 민족 정체성 약화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자발적이고 충동적인 이유만으로 그렇게 많은 사상자가 날 수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중국정부의 주장처럼 이것을 계기로 삼은 위구르 분리주의자들이 배후에서 주동한 측면이 있다고 보인다. 시위가 시작되고 완전히 진압이 될 때까지는 4시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지만, 그 시간 동안 발생한 사망자의 75%가 한족인 것은 본 사건이 계획적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되겠다. 이슬람과 연계된 무장 독립세력들은 중앙아시아와 신장 지역을 넘나들면서 활동하고 있으며, 중국은 이런 세력들을 소탕하기 위해 상하이협력기구라는 국제기구를 통해 중앙아시아 국가들과 공동 대처하고 있다. 또 정부는 신장 내의 무장 세력들의 캠프나 근거지를 소탕하는 작전을 지속적으로 시행해 왔다. 결국 고착화 되어가는 한족과 위구르족 간의 불평등, 위구르족의 정체성 약화와 쇠퇴 등으로 인한 내재된 불만이 광둥성 샤오관 사건을 통해 불 붙여졌고, 기존에 존재하던 이 지역 독립 기도 세력들의 지휘가 합쳐지면서 엄청난 폭발력을 지니게 되었다고 하겠다.

셋째, 중국 정부의 효과적 언론통제와 국제사회의 냉담을 들 수 있겠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중국 정부는 우루무치 사태가 발생하자마자 모든 통신과 인터넷을 차단하였고, 대신 외신기자들의 취재를 제한적으로 허용하였으며 신장위구르자치구 정부에서도 다음날 바로 TV연설을 통해 본 사건이 외부세력의 사주를 받은 내부의 폭력 범죄행위라고 단죄하고 관련 동영상을 내보냈다. 여기에 중국의 높아진 위상으로 인해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는 이 사건에 대해 거의 침묵하다시피 했고, 심정적으로 위구르 민족의 입장을 대변해 주리라고 기대했던 아랍권 및 이슬람권에서도 위구르 민족은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런 국제사회의 분위기 덕분에 중국은 자신들의 진압행위에 대해 거의 비난 받지 않고 본 사건을 조속히 처리할 수 있었다.

넷째, 소수민족과 한족 상호간의 왜곡된 인식이 사건 발생의 중요한 원인이었다. 필자는 우루무치 사태가 났을 때 유튜브(Youtube)에 올라온 시위 영상을 확인 하던 중 게시물에 달린 댓글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 할 수 있었다. 한족으로 추정되는 한 네티즌은 이번 우루무치 사태에 대해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었고, 우루무치의 도심 곳곳에 세워진 높은 건물과 나아진 생활수준이 위구르인들에게는 공허한 꾸란 소리 보다도 못한 대접을 받고 있는 현실을 개탄하며, 그런 발달을 가져오게 한 중국 정부에 감사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그런 발달된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여 위구르인들이 분열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꼬집었다.

물론 한 사람의 글을 가지고 한족 전체를 평가할 수는 없지만, 필자는 중국 정부가 역사적으로 진행해 온 소수민족 정책을 통해 한족들이 자국내의 소수민족과 그 주변 지역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인식하고 있고 어떻게 교육 받아 왔는지를 보면서 문제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근 들어 한국과도 문제가 되고 있는 동북공정이 그 대표적인 예며, 우리나라에는 동북공정만 알려졌지만, 이미 중국은 티벳과 위구르지역의 역사를 자신들의 역사로 편입시키는 작업을 80년대부터 진행해왔고, 지금은 거의 완료한 상태이다. 이것을 일컬어 각각 서남공정(西南工程) 및 서북공정(西北工程)이라고 한다. 신장 지역의 역사를 다루고 있는 서북공정의 내용에 따르면 중국은 한나라 시기부터 신장 지역을 직•간접적으로 통치했었으며 그러므로 신장 지역이 중국 영토였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국 측은 역대 통치권의 강약에 따라 신장에 대한 장악력도 다소 강약이 있긴 했으나 신장의 각 부족은 중국 왕조와 가까운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해 왔고 ‘중화민족 대가정(大家庭)’을 형성하기에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구르 민족이 주장하는 역사와는 많이 다른 관점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필자는 우루무치 사태의 직접적 배경이 되었던 광둥성 사건을 일으키게 했던 원인이 한족들이 보편적으로 가지고 있는 소수민족에 대한 왜곡된 인식 때문이라고 보고, 이런 인식은 중국정부의 소수민족 정책과 역사에 대한 중국식 해석, 그리고 그런 관점으로 교육받은 한족들의 역사인식에 대한 차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교육을 받고 역사인식을 가진 한족들에게는 위구르 민족이나 티벳 민족의 분리 독립 운동들은 분명 국가를 분열하고 파괴하는 행위로 비춰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위구르 민족들은 피지배 민족이라는 열등감과 피해의식에서 오는 왜곡된 시각이 있음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은 한족에 대해 편견을 가지게 했고 이런 한족과 위구르족 간의 전혀 다른 인식의 차이가 결국 광둥성 사건이라는 촉매를 만나 우루무치에서 폭발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앞으로의 전망

우루무치 사태는 이제 어느 정도 진정이 되었고, 그 사건의 주동자 6명과 추가로 3명에 대한 사형판결이 얼마 전 내려졌다. 하지만 연이은 주사기 테러와 알카에다의 성전 촉구 등으로 위구르 사태는 사실상 아직도 진행 중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위구르의 통신 및 언론이 통제된 상황에서 우리에게 알려진 중국 정부의 통계를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별로 없다. 즉, 위구르의 현실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심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위구르 민족의 요구사항인 ‘독립’을 쟁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해 보인다. 왜냐하면 아직은 정부의 통제가 매우 효과적(?)이며 강력하기 때문이다. 위구르인들 중에 현실주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지만, 여전히 위구르 민족은 강한 민족성을 가지고 있으며 이번 사건을 통해서 그 심리적 저항심은 더욱 강해졌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알-카에다와 같은 이슬람 근본주의 단체가 위구르 민족을 간접적으로 지원하고 있다는 증거들은 있었지만, 이번처럼 직접적으로 성전을 촉구하는 것은 거의 없었다. 즉, 조금은 안타까운 전망이지만 제2, 제3의 우루무치 사태가 또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 한족과 위구르족 간에 정책을 통한 화해는 매우 어려워 보인다. 그 땅에 주의 몸 된 교회를 통한 용서와 화해가 유일한 소망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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