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8월, 이집트 전역이 최소 1,000이상의 사망자가 속출된 유혈사태로 들끓었다. 어떤 사람들은 이집트의 민주화에 대해 논하고 있고, 어떤 사람들은 세속주의자와 이슬람주의자에 대결구도에 관하여 토론하고 있다. 이집트의 변화가 주는 중동국제정치질서의 재편에 대해 긴장하기도 하고, 일부 좌파주의자들은 이집트의 정치적 현상을 계급투쟁으로 설명해 보려 노력하기도 한다. 이집트의 현 상황에 관한 여러 설명의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우선 오랜 역사적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이집트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중에서 이집트는 가장 중요한 영적 대접전지 혹은 대격전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전쟁에는 수많은 전투들이 있다. 그 많은 전투들 중,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하고 결정적이어서 양쪽 진영이 수많은 인적, 물적 자원을 투입하여 승리를 따내려고 노력하는 전투지를 우리는 그 전쟁의 “접전지 혹은 ”격전지”라고 부른다. 이러한 격전지는 많은 자원을 투입하고 전략적으로 중요한 만큼, 이 전투에서 패배하며 물러날 경우, 패배한 그 진영은 전체 전쟁에서 치명타를 입게 되는 것이다. 이는 즉, 중동 여러 나라 중, 하나님의 사랑과 정성이 가장 많이 들어간 나라 중 하나라는 뜻인 동시에, 사단 역시 살아서 이곳에 강하게 역사해 왔음을 의미한다.

1. 사단의 전략적 교두보 : 강력한 이슬람의 벽

이집트에 투입한 사단의 영적 자원은 뭐니뭐니해도 강력한 이슬람의 벽을 구축해 온 것이다. 그는 전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슬람의 벽을 이 나라에 구축해 왔다. 현재 이집트의 이슬람의 벽은 세 가지 역사-사회적 세력에 의해 지탱되고 있다.

(1) 알 아즈하르 대학교 : 정통순니신학의 전 지구적 중심지

흔히 많은 사람들은 무슬림이 꾸란을 믿고 있다고 오해하고 있다. 무슬림 자신들도 꾸란을 믿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무슬림들은 이슬람 신학을 믿고 있다. 기독신앙 역시 성경을 기초로 한 기독교 신학을 믿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지만, 기독교의 경우에는 성경과 신학 자체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이 아니고, 실제로 대부분의 신학적 해석이 성경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 기능을 잘 하고 있기 때문에 기독교 신학을 믿는다고 해서 우리가 성경을 믿지 않는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슬람의 경우에는 이와는 큰 차이를 보인다. 꾸란은 적절한 권위를 가진 사람들의 신학적 해석 없이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에는 지나치게 난해한 책이다. 꾸란은 메카계시와 메디나계시로 나뉘는데, 특히 종교적 계시 성격이 강한 초기의 메카계시의 경우에는 영적 카타르시스 속에서 뿜어내는 것 같은 시적 문장들이 대부분이기 때문에 신학적 해석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무슬림들은 역사적으로 이슬람신학이라는 것을 체계화 시켜왔고, 이것은 꾸란과 같은 거의 절대적 권위를 갖는다. 이러한 역사적 해석들은 하디스라는 모음집에 집결되어 있고, 이것은 꾸란이라는 공식적 권위 하에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 하디스의 가르침과 해석이 무슬림의 실제 삶과 사고방식, 신앙을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의 역사적, 신학적 스펙트럼에 따라 순니파와 시아파가 나뉘어 있고, 다시 순니파 내에 여러 분파들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영향력있고, 권위있는 정통순니신학의 중심지가 바로 이집트 카이로에 위치하고 있는 알 아즈하르 대학교 신학부이다. 10세기에 설립된 이 대학교는 세계최초의 근대적 의미의 대학교이고, 신학부, 법학부를 중심으로 시작하여 지금은 종합대학으로 발전해 있다. 무슬림 신앙고백이 없는 자는 입학이 불가능한 이 학교는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의 동남아시아, 키르키즈스탄, 우즈벡키스탄 등의 중앙아시아, 프랑스, 영국 등의 유럽, 그리고 타아랍국가 등 전 세계의 아랍-비아랍권의 이슬람지도자 후보자들이 유학생으로 와서 정통순니이슬람신학을 배우고 있는 전세계 신학체계의 중심지인 것이다. 특히 비아랍권 무슬림들의 경우에는 이 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표준아랍어 학습에만 5년가량을 이곳에서 투자한다. 알 아즈하르 대학교에서 유학을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간 자들은, 알 아즈하르 대학교 출신이라는 것 하나만으로 본국의 이슬람 사회 내에서 최상위권의 종교권력을 획득하게 되는 것이다. 전세계 순니무슬림들을 신학체계로 움직여 나가는 이 대학의 영향력은 당연히 이집트 내부에서 또한 강력하다. 그래서 이집트의 이슬람은 이 정통순니신학에 의해 최상층 엘리트에서부터 일반노동자에 이르기까지 강력한 체계를 이루고 있다. 이집트 무슬림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해 본 사역자라면, 계층을 불문하고 이들이 타아랍국이나, 비아랍국의 무슬림과는 다른 상당히 탄탄한 이슬람의 신학체계로 훈련되어 있다는 것을 동의할 것이다. 이 대학은 역사적으로 순니이슬람세계의 지도자들을 배출해 왔고, 순니 이슬람 신학의 정신적 기둥이 되어 왔다. 그 영향력은 가히 전지구적이다.

(2) 무슬림형제단 : 전세계 근본주의 이슬람 운동의 모체

이집트의 이슬람세력은 이론적 신학체계에 제한되지 않는다. 1928년, 초등학교 교사출신인 하산 알 반나라는 20대 초반의 청년은, 서구세계와 세속가치에 유린당하는 이집트를 바라보며, 강력한 이슬람 근본주의 사회운동을 시작했다. 전세계적인 이슬람 근본주의 운동이 197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가동된 것을 생각하면, 이집트에서의 이 운동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대부분의 이슬람 운동의 사회의 고위층을 겨냥하여 소위 “상층으로부터 하층으로(top-down)” 방식의 사회변혁을 추구한다면, 하산 알 반나의 운동은 처음부터 풀뿌리 운동(grass-root movement)의 성격을 가진 “하층으로부터 상층으로(bottom-up)” 방식을 추구했다. 그는 이스마일리아라는 지방의 한 소도시에서 하층민들이 모여들었던 커피숍을 중심으로 서민들을 이슬람으로 복귀하고 이슬람사회를 건설해 나가야 할 것을 설득하기 시작했고, 불과 수년 만에 수도 카이로까지 지부를 개척하는 놀라운 확장력을 보이기 시작했다. 하층에서 시작한 운동은 결국 사회의 엘리트층까지 가세하였고, 의사, 변호사, 비즈니스맨, 교수, 교사들, 종교지도자 등 사회 내 모든 계층이 이 운동의 네트워크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순식간의 이 운동은 이집트 사회 전반을 장악해 갔고, 이에 위협을 느낀 군부와 비종교적 민족주의 세력은 이들을 불법단체로 규정하거나 정치활동을 공식적으로 하지 못하도록 규제해 오게 되었다. 사회 내에선 가장 영향력 있는 세력이었지만, 거의 60년동안 정치세력화 하는 것이 탄압되어 온 이 조직은 오히려 운동조직 특유의 생명력을 유지시키며 이집트 사회를 장악해 오고 그들의 정신을 강화시켜온 것이다. 이들의 운동은 즉각 이집트 외부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여, 각 국가에 지부를 개척하기 시작했고, 리비아, 튀니지, 시리아, 요르단, 팔레스타인 등지에 지부를 개척하였고, 팔레스타인 지부는 이후 하마스로 발전했고, 이들의 제자들은 알 카에다 등 국제근본주의 운동의 지도자들이 되었다. 이들 지부는 현재 유럽 내, 심지어 미국 내에서도 활발히 개척되어 있고, 가히 중동과 서방을 가로지르는 전지구적인 근본주의 네트워크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2011년 무바라크의 40년 독재체제가 무너지자 모든 전문가들은 70%이상의 지지를 이 무슬림형제단이 독식할 것으로 예상할 정도로 이들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결국 그들은 의회다수를 차지하였고, 이집트 근대사의 첫 민선대통령까지 배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미 무너진 이집트의 사회-경제적 상황에서의 이들의 정치권력 획득은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독이 되어 집권 1년만인 지난 7월, 이들은 자유주의자들과 군부에 의해 축출되었고, 이윽고 지금과 같은 폭력진압에 의해 테러조직처럼 이곳에서 다루어지기 시작하게 되었다. 1,000명 이상이 죽어가는 대형 살상의 상황에서도 이들은 전국적인 시위를 조직하고 실행하고 있다. 이들의 사회조직이 얼마나 강한지를 반증하는 것이고, 이집트의 권력을 유지하려는 어떤 세력도 무슬림 형제단 조직을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수많은 국제세력들은 이집트의 무슬림 형제단 지휘부에 조응하여 움직이고 있다.

(3) 살라피스트 : 극보수 이슬람종교주의 세력

그러나 세계 근본주의운동의 모체인 무슬림형제단 운동은 이집트에서는 최고 과격 이슬람주의자로 분류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살라피스트 세력이 강력하게 모스크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살라피스트는 무슬림형제단보다 훨씬 종교 근본주의 성향이 강하여 소위  “무함마드 시대로의 복귀(back to Muhammad)”를 주장하는 자들이다. 이들의 극단적인 정치성향으로 인하여, 무슬림형제단은 온건주의 중도 이슬람주의자로 분류되며, 이들 살라피스트들이 극단 이슬람주의자로 분류되곤 한다.

이들 역시 2011년 혁명이후, 즉각 정당조직을 출범시켰고, 정식 당 강령으로, 정식 이슬람 신정국가체제 출범을 선포하였다. 즉, 자신들이 집권할 경우, 1979년에 맺은 이스라엘과의 평화협정을 정식으로 파기하고, 이스라엘과의 즉각적인 전쟁에 돌입할 것을 천명하였다. 그리고 이집트의 모든 헌법은 이슬람법인 샤리아로 대치될 것이며,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는 자는 즉각 사형에 처하게 될 것임을 분명히 하였다. 이집트의 사회적 체제가 이미 강력한 이슬람화가 되어 있지만, 국가 체제를 이슬람 공화국으로 정식출범시키겠다는 이들의 공약은 또 다른 차원의 과격함인 것이다.

실제로 이들의 사회적인 지지층 또한 만만치 않다. 2011년 70%이상이 무슬림형제단을 지지할 것이라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깨고, 무슬림형제단은 45%정도의 의회선거 지지를 획득한 한편, 살라피스트가 나머지 이슬람주의자 25%를 장악하였고 이것은 필자에게도 큰 충격이었다. 이집트인의 1/4이 위에서 열거한 최극단의 이슬람정책을 지지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극단 종교세력이 많다고 하는 이스라엘 조차도 소위 “극보수주의(ultra-conservative)” 유대인이 전체인구의 10%정도를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이집트의 살라피스트들은 종교기관들을 강력하게 장악하고 있고, 이들의 가르침은 매주 금요일 모스크를 통해 강력하게 모든 이집트 무슬림들에게 설파되고 있다.

2. 보론 : 이집트로부터 시작되는 중동 정치질서의 재편

중동의 정치질서변동은 이스라엘과 아랍세계 간의 평화프로세스의 일환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중동의 사태를 논평하는 어떤 국가의 태도 역시, 각 국가의 정치세력의 이익과 더불어 이 평화프로세스 상에 미리 짜여진 역할 배분에 따른다는 것을 명심할 필요가 있다. 지난 7월 무슬림형제단 출신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에 대한 자유주의자들과 군부의 강제하야 조치는 무슬림형제단의 경제정책실패와 독단적으로 비추인 배타적 이슬람주의 정책에 불만을 품은 대다수 국민들의 여론에 힘입은 것이다(무르시 대통령의 당선표수가 1,300만표 가량이었고, 6-7월에 거리로 쏟아져 나온 반무르시 시위대 규모가 3,000만명을 넘어섰다). 집권 1년 만에 무슬림형제단이 70년 이상 쌓아온 사회적 신뢰가 급격하게 무너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적 과정과 관계없이 중동국제정치의 논평은 즉각 위에 말한 “각본 아닌 각본”대로 쏟아졌다.

지난 7월의 사태는 민주주의 절차에 의하면 명백한 쿠테타 작업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쿠테타”라는 말을 쓰지 못했다. 왜냐하면 미국 내 법에 의하면 쿠테타로 정부를 장악한 국가를 상대로는 대외원조를 할 수 없게 되어 있는데, 이집트는 중동 평화프로세스에 가장 중요한 미국의 도구로서 군부에 대한 막대한 원조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지난 한 주간 막대한 유혈사태가 발생하자 이를 규탄한다는 발표만 할 뿐이었다. 미국은 이러한 공식입장을 취하지만, 미국의 진짜의도는 항상 걸프국가 등을 통해 중동에 실현되어 왔다. 카타르를 제외한 사우디아라비아와 모든 걸프국가들은 즉각 군부를 지지하고 나섰고, 무슬림형제단을 테러세력으로서 제거해야됨을 천명하였다. 반면, 터키와 팔레스타인 하마스, 이란 측은 강력하게 이집트군부의 학살조치를 비난하며 무함마드 무르시 대통령이 복귀해야 함을 주장하였다. 특히 여기서 우리는 터키의 역할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터키의 경우는 이슬람정당조직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국제자본세력과 손을 잡고 지난 10년간 경제개발을 성공시켜온 자신감을 기반으로 중동의 리더요, 중동경제발전의 모델로서 자리매김하던 터라, 이들의 발언은 매우 중요했는데, 터키 국내에서는 이집트 국기까지 등장한 대규모 시위를 통해 이집트의 국내문제에 압박을 가하고 있다. 왜냐하면 터키는 앞으로도 중동개발의 모델로서 그 정치적 정당성과 영향력을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치적 정당성 문제에 대해 유럽과 미국보다도 오히려 터키가 가장 큰 목소리로 리더십을 가지고 이 문제에 나서는 것이다. 중동의 절대다수인 무슬림들의 인정, 민주적 절차의 정당성, 그리고 경제개발성공의 리더십의 3대축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중동의 리더로서 터키는 모델화되어 가는 것이 글로벌 엘리트들의 구상이다. 그리고 유럽과 미국은 유혈사태만을 규탄하며 상대적으로 뒤편으로 물러나 정치적으로 상대적 중립을 유지하고 있다.

2010-2011년을 기점으로 기존의 중동 독재체제가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해 여러 나라에서 차례로 무너졌다. 지금도 시리아 등지에서 그 작업은 진행 중이다. 그리고 이 이슬람주의자들의 정치세력은 이곳 이집트를 시작으로 다시 퇴출되는 과정에 들어선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 군부나 자유주의 경제세력들이 중동을 점차 장악해 갈 것이며, 터키식의 국제자본에 의한 경제개발이 중동에 가동되리라 조심스레 예상해 본다. 그리고 이제부터 정권을 장악하는 어떤 정치세력도 결정적 권한은 거세된 채 글로벌 엘리트 세력에게 더 쉽게 종속되는 약한 정부가 될 수밖에 없다. 이로부터 추진될 자유주의화의 물결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낭만적 경제개발이 아니라, 이스라엘과의 평화라는 가장 큰 주제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다. 이집트가 유혈사태로 들끓는 와중에, 한편으로 이스라엘에서는 팔레스타인과의 평화회담이 극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회담 당사자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회담이 성공적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당사자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중동에 터키식의 자본주의 운동을 일으키는 국제엘리트들이 나중에 이 평화과정을 주도하고 그들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게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어찌되었든, 이제 중동에서 무슬림형제단을 중심으로 한 이슬람 정치세력의 정치적 영향력은 현저하게 감소하게 될 것이며, 이미 시작되었다. 2010년 혁명의 시작점이었던 튀니지에서도 불과 2-3년 만에 반이슬람정치적 성향이 전국을 뒤덮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곧 더 큰 어둠의 세력인 경제적 자유주의가 이 땅을 조금씩 덮어갈 것임을 의미한다. 독재정권들의 붕괴→이슬람정치세력→경제적자유주의세력(약화된 정치주체 하에서의)을 향해 중동이 재편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어둠의 끝은 “중동의 정치적 평화”이며, 이것은 하나님의 “샬롬”이 아닌, 사람들을 미혹하고 하나님을 대적해 온 어둠의 글로벌 엘리트세력이 중동을 장악하는 과정인 것이다.

3. 하나님의 전략 : 마지막 아랍의 영적대군 이집트교회

이러한 모든 사단의 역사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살아서 지금도 그분의 재림을 향해 전진하신다. 중동지역, 특히 중동의 아랍지역은 강력한 순니무슬림 집중지역이고, 이것은 마지막 유대인들의 복음화 직전의 가장 중요하고 광범위한 복음화 대상지역이다. 아랍에는 토착 기독교세력이 전체인구의 5-10%가량을 꾸준히 유지해 왔지만, 복음전도에 있어 이들은 주변의 무슬림들과 철저히 역사적으로 분리되어 있어 왔기에, 사실상 아랍순니무슬림들은 0%의 복음화율의 민족들이라 보고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1) 중동 아랍교회의 역사적 계약관계와 이집트교회의 특이성

세계교회는 크게 2종류의 역사적 과정을 통해 형성되어 왔다. 하나는 서방교회이며, 다른 하나는 동방교회이다.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서방으로 향해 나아갔던 교회는 사도바울을 시작으로 소아시아지역, 그리스, 유럽남부를 지나 유럽전체, 아메리카대륙과 아프리카, 그리고 동아시아지역에 정착해 왔다. 그런데 서방으로 나아갔던 이 초대교회를 관할하고 있던 정치세력은 로마제국이었다. 이 로마제국의 기독교인들을 향한 정책은, “예수를 믿으면 죽인다!”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사상에서 오직 황제는 그들의 시저뿐이었고, 천국의 왕인 예수를 그들은 인정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방을 공략했던 초기의 그리스도인들은 죽임당하는 것을 선택하였고, 그 결과 수많은 순교자의 피가 흘렀다. 그리고 그것이 서방교회의 역사적인 기반이 되어 그 위에 교회가 개척되어 갔던 것이다. 그래서 이 서방교회의 역사적 전통을 따랐던 교회는 항상 순교를 그 시작으로 민족들의 문을 열어갔다. 아프리카교회도 그리했고, 중국, 일본, 한국의 교회도 수많은 순교자들을 기반으로 역사적 교회들이 시작되었다. 그렇게 이 순교를 기반으로 한 서방의 교회는 글로벌 리더십을 가지게 되었고, 이 복음의 역사적 리더십은 꾸준이 서쪽으로 진행하여, 오늘날 한국-중국을 지나 몽골, 카자흐스탄, 인도 등까지 이른 것이다.

그러나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하여 동방으로 나아갔던 교회들도 있었다. 중동과 페르시아, 그리고 멀리는 중국서쪽에까지도 이른 이른바 동방교회들이다. 이들을 지배했던 정치세력은 서방과는 달리 페르시아제국이었다. 정면으로 대응하며 교회들을 죽이고자 했던 로마제국과는 달리, 페르시아제국의 정책은 훨씬 정교하고 교묘해서, 기독교를 인정하되 그들만 절대진리라고 주장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종의 종교다원주의를 채택하였다. 즉 광대한 페르시아 제국 내에는 다양한 종교세력이 존재하니, 기독신앙자체를 그들과 그들의 자손이 가지는 것은 상관없지만 그 종족들 밖으로 “전도”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초기의 동방교회 지도자들은 이 제국과 타협할 수 밖에 없었고, 이것이 동방교회의 역사적 전통이 된 것이다. 이 후 이슬람의 운동이 중동, 북아프리카, 아시아의 상당지역을 뒤덮게 되었고, 사막에서의 통치기술 밖에 없었던 아랍정복인들은 페르시아의 이 종교정책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 그래서 이슬람체제 내에서 기독인들은 사회적으로 그 존재는 인정되었지만, 전도사역은 엄격하게 금지되어 왔고, 이것은 기독교가 중동에 살아남게 되는 일종의 “역사적 계약관계”였던 것이다. 그 결과 아랍기독인들은 아랍무슬림들과 분리 아닌 분리 속에서 지금까지 공존해 왔던 것이다. 아랍교회는 2,000년을 이어내려온 깊은 역사적 정통성에도 불구하고 복음전도의 역동성이 철저하게 거세된, 영적 도전정신이 마비된 교회로 살아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동방교회 중, 약간은 예외적인 교회가 있었으니, 이것이 곧 이집트교회이다. 이집트교회는 마가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교회이다. 그리고, 이슬람이 들어왔을 때에도 저 유명한 모까담의 일화처럼, 이슬람의 개종요구를 믿음으로 저항했던 역사를 가진 교회이다. 지금도 카이로의 모까담에 가 보면 신기할 정도로 거대한 평지위에 정말로 산이 옮겨와서 세워진 듯, 큰 산이 불쑥 솟아있다. 이 모까담의 일화가 역사적 사실인지 여부를 떠나, 이집트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이들은 대부분 아랍교회에서는 거세된, 일종의 “저항영성”을 그들은 유지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저항영성”은 결과적으로 10%가량, 즉 1,000만의 이집트교회를 아랍한복판에 형성시켜 온 것이다. 이들의 대부분은 콥틱정교회이고, 이들의 “역사적 버팀작업”의 기반 위에 개신교도 형성되어 1%가량이 활동하며 중동최대의 개신교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들은 레바논교회와 더불어, 중동 내 기독운동의 리더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위성방송, 성경을 비롯한 각종 기독출판물, 찬양사역, 말씀훈련 등에 있어서 중동 내 기독인들이 훈련받을 수 있는 아랍어 컨텐츠 등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는 진원지가 되고 있는 것이다.

(2) 최근 이집트교회의 연합과 각성의 움직임

2011년 정권이 붕괴되자마자 이집트교회 내에서 또한 놀라운 움직임이 시작되었다. 같은 해 11월 11일은 이집트교회 현대역사상 최초의 콥틱-개신교 연합철야기도회가 열린 날이었다. 콥틱정교회는 본래 개신교 신자를 그리스도인으로 인정하긴 하지만, “교회”로서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그들 입장에서 개신교는 연합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집트 내 시위사태를 거치면서, 최대 개신교 장로교회인 까스르 일 두바라교회의 정치-사회적 리더십이 인정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장로교회는 위치도 시위의 진원지인 타흐리르 광장 한복판에 자리잡고 있어, 시위가 있을 때마다 군부에 의해 다치는 무슬림들을 치료해 주었고, 시위현장에서 인간띠까지 만들면서 무슬림들을 위해 기도하곤 했다. 본래 자신들이 이집트사회의 기독인들의 버팀목이라 여겨왔던 콥틱의 젊은 지도자들은 이들 개신교 또한 함께 기도할 동역자임을 고백하기 시작했고, 11월 11일 역사적인 연합집회가 성사된 것이다. 80,000명 이상이 모인 모까담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는 외침으로 차고 넘쳤고, 이들은 이집트의 무너진 현실 앞에 하나님의 부흥을 간구하였다. 이미 오랫동안 이집트를 위해 기도해오고, 하나님 나라의 역사를 간구해 오던 수많은 지하의 중보자들이 한 마음으로 연합하기 시작한 것이다.

(3) 역사적 계약관계를 파기하라 : 이집트교회의 청년 선교운동

우리 사역팀은 이러한 맥락도 모른채,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따라 2011년 여름에 이집트에 정착하기 시작했다. 1월에 터진 혁명 직후였고, 11월의 연합집회 직전의 시기였다. 이미 아랍권 사역의 경험이 있던 우리팀은 처음부터 우리만의 개척사역을 고집하는 것보다는 이집트교회가 본래 하고 있었고, 하려고 하는 것을 잘 돕는 것이 우리 선교사들의 중요한 임무임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집트에는 이미 기독세력이 잘 성장해온 것을 알았던 우리는 두 달간 집중적으로 이곳의 기독리더들과 청년들을 만나 우리의 역할이 무엇일지를 고민하였다. 특히 앞에서 언급한 까스르 일 두바라교회의 풀타임 장로님과의 면담이 매우 인상적이었는데, 그분은 이집트교회의 영적 리더십이 얼마나 살아있는지를 우리 눈앞에 확인시켜 주었다. 그분은 자기 교회의 영적 부흥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살아서 역사하는 하나님나라의 도래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어떻게 그동안 이집트 사회를 공략해 왔으며, 하나님이 어떻게 수많은 이집트의 지하 곳곳에서 역사하고 계신지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우리는 기적적으로 짧은 시간동안 신실하게 지하에서 몰래 사역하고 있는 귀한 팀들과 연결될 수 있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공식적이면서도 실질적인 이집트의 영적 지형을 그릴 수 있었고, 그 영적 진단들의 결론은 이제 이집트 청년들 사이에 본격적인 선교운동이 시작될 때라는 것이었다.

아무리 저항영성이 살아있다고 해도, 이집트교회 역시 무슬림과의 역사적 계약관계 속에서 생존해 온 교회라 무슬림들을 사역적 대상으로 여기고 공략하는 일은 매우 드물다. 그래서 이집트교회의 영성은 교회 내부를 깨우고 훈련하는 데에 집중되어 왔고, 이집트를 중동과 아랍의 전략적 관문이라고 여겨왔던 수많은 단체의 신실한 사역자들이 이 훈련을 도와왔다. 그래서 이집트교회는 수많은 훈련프로그램들이 가동되어 왔으며 컨퍼런스와 수련회가 매우 활성화되어 있다. 그러나 이 수많은 컨퍼런스와 훈련들 중, 무슬림들을 사역대상으로 여기고 가르치는 곳은 거의 전무하다 시피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사회적 금기”이기 때문이고, 이것이 무슬림과의 역사적 계약관계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지하에서 몰래 이 사역을 해 온 몇몇 리더들과 조직이 있을 뿐이었다. 우리는 이것이 우리팀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했고, 몇몇 이집트교회 지도자들로부터 분명한 확증을 받고 이 운동을 시작하였다. 청년들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이들은 아랍권의 전도자, 선교사들로 훈련받기를 간절히 원했다. 지난 2,000년간 하나님께서 유독 이집트의 교회만 중동에서 이렇게 보호하시고 성장시켜주신 이유가, 자신의 가족이나 이집트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전세계 기독리더들이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는 마지막 아랍순니무슬림 전역을 위한 것이었음을 이곳 청년들이 확신하기 시작한 것이다. 22개국 4억의 아랍무슬림들이 우리에게 펼쳐져 있고 이것이 마지막 이집트교회의 영적 유업이며, 동시에 이것은 역사를 마감하는 마지막 운동이 될 것이라는 도전이 이곳 청년들 심령에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이들은 그동안 자신들이 받아왔던 훈련이, 무슬림들을 향한 전도현장에서 터져나오기를 바랬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훈련을 이들을 무슬림들을 대상으로 한 현장의 전도자와 교회개척자로 세우는데 집중시키기 시작했다. 이들에겐 이론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현장에서 입을 열기 시작하는 것이 필요했다. 왜냐하면 이것은 1,500년간의 이슬람과의 타협을 깨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어려운 일이었다. 우리도 가끔 이슬람권 사역에 두려움을 느끼지만, 우리는 상대적으로 아랍의 외부인들이기에 위험을 인지하지 않고 쉽게 무슬림에게 복음을 전해왔다. 그러나 이들이 무슬림들 앞에서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신들의 모국어인 아랍어로 말하기 시작하는 일은 기적에 가까운 일인 것이다. 처음에 이들과 타아랍국에서 전도사역을 훈련하기 시작했을 때, 두려움에 떨며 복음을 말하지 못하는 지체들을 보았다. 말하기 시작하더라도, 그저 종교적인 토론정도로 그치는 것을 자주 보았다. 그러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점점 복음의 담대함을 가진 청년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종교적으로 기독교의 장점을 경쟁적으로 설명하는 전도가 아니라, 영혼의 죄악과 파멸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며 구원을 받을 것을 종용하는 살아있는 전도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도 능숙한 아랍어로 아랍무슬림들 귀에 복음이 선포되기 시작했다. 게다가 이집트의 아랍어는 타아랍국가의 아랍어에 비해 2배정도는 빠르고, 이집트인의 성품 자체가 아주 활발하고 공격적이다. 보통 아랍의 기독인들은 사회적 소수자로서 무슬림 앞에만 서면 억눌려있기 마련이지만, 이집트 기독인들이 타아랍국의 무슬림 앞에 섰을 때에는 이러한 억눌림이 거의 사라지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집트인 특유의 다이나믹한 아랍어 복음전파가 시작될 때 대부분 타아랍국의 무슬림들이 듣고 또 일부는 깊이 있는 반응을 보이는 것을 목격하였다. 우리는 하루하루 사역할 때마다 섬세한 사역적 피드백을 해주었고, 불과 현장전도사역 시작 열흘만에 열 가정에 가까운 무슬림들이 부모로부터 자식까지 통째로 반응을 보이는 놀라운 결과들을 볼 수 있었다. 이는 외국인 장단기 사역자의 2-3년 동안의 성과를 능가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이후의 더욱 깊이있고 본격적인 교회개척작업을 위해 사역팀을 더욱 날카롭게 다듬고 있다. 1,500년 된 역사적 계약관계에 이제 균열이 가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감사한 것은 이러한 역사적 계약관계를 파기하는 일에 주께서 우리 한국교회를 쓰고 계시다는 것이다. 세계 여러 민족들 중, 우리만이 가진 저돌적이고 순종적이면서도 팀사역에 강한 영적 DNA가 있다. 그리고 우리의 지식이 아니라, 이러한 삶과 사역의 영성을 이집트의 청년들이 매우 좋아하고 닮고 싶어 한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지만, 하나님의 역사적인 부르심의 무게가 얼마나 큰지를 절감한다. 이집트의 청년들이 한국교회의 우리 청년리더십과 함께 아랍을 뚫고 가길 원하고 있고, 이 역시 우리 한국교회의 마지막 작은 영적 유산이 아닐까 싶다.

4. 환상 : 거대한 하나님의 강물

우리는 지난 2년 동안 하나의 거대한 환상을 보고 있다. 그것은 이집트에 고여 있는 거대하고 높은 생명의 영적 강물이다. 이 큰 강물은 역사적 강둑에 의해 둘러싸여 막혀있다. 그리고, 대부분 영적 사막과 같은 아랍지역에서 곡괭이질을 하며 물을 파는 우리의 동역자들이 보인다. 한 방울의 영적 생명수를 위해 모두가 전력투구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이 이집트의 큰 강물을 둘러싼 견고한 강둑에 정을 박고, 못을 박으며 모두가 이 둑을 무너뜨리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 강둑이 처음에는 금이 가더니, 나중에는 이 둑이 거대한 강물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터져 나오고, 넘쳐흘러, 모든 아랍을 휘어감고 뒤덮어 버린다.

하나님은 마지막 역사의 완성을 위해 중동한복판에, 이 마지막 전쟁을 위해 남겨두신 그루터기와 같은 당신의 군대를 모으고 계신다. 이것은 절대적인 하나님의 주권이다. 우리가 조작하거나 이루어낸 것이 아무 것도 없고, 오직 우리는 급박한 이 하나님의 파도 위에 올라탈 뿐이다. 절대주권으로 천지를 지으시고, 아들을 보내시며, 제국의 흥망성쇠를 주관해 오신 그분이, 이제 이 마지막 중동 땅을 뒤흔들고 계신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들의 통제왕국건설을 위해 중동을 움직일 때, 하나님의 당신의 영적 군대를 일으키고 계신 것이다.

<박바울-서울대학교 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중동 및 이슬람관련 연구 다수>

저작권자 © 미션투데이(Mission Today)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