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복음과 율법의 관계 2

1 끝으로 나의 형제들아 주 안에서 기뻐하라 너희에게 같은 말을 쓰는 것이 내게는 수고로움이 없고 너희에게는 안전하니라 2 개들을 삼가고 행악하는 자들을 삼가고 몸을 상해하는 일을 삼가라 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4 그러나 나도 육체를 신뢰할 만하며 만일 누구든지 다른 이가 육체를 신뢰할 것이 있는 줄로 생각하면 나는 더욱 그러하리니 5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6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 7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8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9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 [빌립보서 3:1~9]

‘끝으로’로 번역된 loipovn(로이폰)을 그냥 ‘그러므로’라 생각하는 것이 좋겠는데, 앞에서도 고난 중에 소망하며 기뻐할 것에 대해 말했고(바울과 함께 복음의 일에 동참하며) 여기서도 ‘복음의 일을 하기 때문에 받는 고난을 감내하라! 그래야 구원(천국)을 기대할 수 있고 소망할 수 있기에 고난이 있음을 오히려 기뻐해야 할 것이다.’는 말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너희에게 이같은(앞에서 말하던 것) 말을 쓰는 것이 내게 수고로움이 없다.’는 표현을 한 것인데, 수고로움이라 번역한 ojknhpov”(오크네로스)는 ‘싫증남’이라는 뜻을 가진 단어로 ‘복음과 함께 고난을 받으라!’는 말은 아무리 말해도 과함이 없고 거듭해서 그리고 계속해서 말하고 강조해야 하는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같은 가르침이 현재적으로 믿는 자들을 안전하게 하는 것인데 ajsfalhv”(아스팔레스)라는 표현이 또한 현재적으로 믿어 복음을 위한 고난에 동참하고 있는 자라 할지라도 언제든지 위험한 상태에 처할 수 있음을 알게하는 것이다. ajsfalhv”에서 a만 빼면 ‘비틀거리다. 넘어지다.’라는 뜻으로, 안전하지 않다는 것은 넘어지고 쓰러져 죽을 수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리고 바울은 빌립보서 전체적으로 빌립보교인들이 구원받기에 합당하도록, 구원을 위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준비시키기 위한 것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2절에 나타난 2개의 표현들이 ‘탐욕자들, 사리사욕을 채우는 더러운 자들’을 의미함이 분명하고, 마지막 1개의 표현이 할례파 즉 손할례당을 의미한다고 볼 때 3절 이하는 앞의 2개의 표현들도 율법주의자들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서로 다른 것을 말하고 하나만 말하지는 않을 것이기에…)

그렇다면, 유대주의와 율법주의가 왜 탐욕과 더러움과 세속적인 것과 이 땅의 것들로 자신을 높이고 자랑스럽게 여기려는 것과 직결되는가? 그것은 율법(구약)주의가 이 땅의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려는 것이기 때문이며, 그렇지만 그렇게 하는 것으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뜻을 드러내고 행할 수는 없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그래서 복음(신약)을 바라보게 하는 것이며, 새 창조가 아닌 첫 창조에 소망을 두고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 착각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율법(구약)도 하나님의 말씀이며 하나님은 율법을 통해서도 구원받을 수 있을 것처럼 말씀하셨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구원을 통해 진짜 의도하신 것은, 첫 창조가 비록 하나님의 사랑과 능력과 지혜로 생명을 준 것이었지만 그것이 인간의 타락으로 구원을 줄 수 없는 것으로 변질되고 소망할 수 없는 것이 되었기에 소망할 수 있고 구원시킬 수 있는 새로운 말씀을 주신 것인데, 그 새로운 말씀을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아 알 수 있도록 하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까지 제대로 알려주셨음에도 여전히 세상 가운데 소망을 두고 사는 자들이 많으니 그들은 세상의 것들을 자랑하며 세상의 것들을 위해 사는 신약으로 넘어오지 못한 구약주의자요 율법주의자임을 알아야 할 것이다.

5~9절 : 바울은 구약주의자,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은 구약을 다 지킨 자요, 눈에 보이는 육체적 조건은 다 갖춘 자라 말하면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런 구약 말씀을 통해 정말 의도하신 것은 구약 말씀이 아니라 신약의 말씀이고 그리스도며 그리스도의 복음이기에 자신은 더 이상 눈에 보이는 조건들을 채우는 1차원적이며 비본질적이며 껍데기적인 것을 추구하지 않고 구약과 신약이 모두 의도하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를 알게하는 복음을 위한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구약에서 신약으로 자신을 옮길 때 구약적인 것 즉 세상적이고 첫 창조적인 것을 허물벗듯이 벗고 오히려 그것을 추구하는 것을 해롭게 여겨야 하는 것인가? 그것은 구약의 소욕 즉 이 땅에서도 왕국(하나님의 나라)을 이룰 수 있고 이 세상에서도 높아지면서 천국에서도 높아질 수 있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구약을 온전히 버리지 못하는 자로 유혹하고 괴롭힐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니 세상 소망은 완전히 끊는 것이 현명한 처사이며 아예 쓰레기처럼 취급하는 것이 안전한 생활습관인 것이다.

이런 생활습관과 태도를 견지하는 자에게만 그리스도 안, 즉 구원이 있음을 9a가 말해주고 있는 것이며, 그러하기에 9절에 나온 ‘내가 가진 의’와 ‘그리스도를 믿음’은 ‘신약의 말씀을 지킴, 그리스도와 그의 복음을 위한 삶을 삶, 복음에 합당한 행실이 있음 즉 그리스도의 일·복음의 일에 동참함으로 고난을 받는 자가 됨’을 의미하는 것이지, 율법주의를 무슨 ‘행위주의’ 또는 ‘열심주의’로 오해하여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는 식으로 말하고 이해하는 것은 구약이 아예 하나님의 말씀도 아니었다고 치부해버리는 무지하고 무책임한 언사인 것이다.

구약은 이 땅에 소망을 두고 이 땅의 것으로 자랑하며 이 땅의 복된 것이 정말 하나님의 복으로 생각하는 성공주의·형통주의·고지론·번영신학·기복주의를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도 그리스도의 시대와 같이 이런 율법주의자들에 의해 기독교는 거의 점령되어 있고 기도도 점철되어 있으니(이 땅의 소망적인 것들로) 확실히 율법주의는 지금도 강력한 복음의 적대세력인 것이며 그래야 율법주의를 경계하는 신약 성경들이 지금도 매우 필요한 것이 될 수 있는 것이다.

한편, 율법주의를 단순히 형식주의나 외식하는 정도로만 보는 것과 카톨릭적 행위, 즉 인간적 선행을 행위로 보고 ‘보라! 행위로 구원받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카톨릭에서나 주장하는 것이고 그런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다.(이 말은 맞는 말이다.)’라고 말하며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율법주의를 너무 축소해서 생각하는 것(종교형식만 행하면 된다는 식의 격식주의와의 싸움만 할 수 있을 뿐이다)이 되며 인간적 선행과 그리스도적 선행을 구분치 못해서 벌어지는 happenning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러니 더 이상 율법과 복음을 말하면서 안해도 되는 의로움과 구원을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세상의 것들을 위한 행위와 인생을 멈추고(또는 보이기 위한 신앙생활을 그만두고) 이제부터는 ‘우리를 참으로 구원에 이르게 할 수 있는 능력과 지혜가 있는 신약의 일, 그리스도의 일, 복음의 일을 행하자!’는 올바른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말을 해야 할 것이다.

정재식 목사 / 서울경찰청 경목실 청년담당 사역자, ‘평신도사역 이렇게하라’ 저자, 총신대학원 M.Div 수료

 

[입력: 2015-06-08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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