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이슬람권에서의 기독교회

역사 속의 큰 두 가지 교회

역사 속 교회의 모습은 크게 2가지 기류를 형성해 왔다. 하나는, 예루살렘으로부터 서쪽으로 이동했던 교회, 다른 하나는 동쪽으로 이동했던 교회이다. 처음에는 하나의 영적인 전통을 가지고 있던 이 두 종류의 교회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정적인 영적인 차이를 보이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그들이 각각 상대했던 지배제국의 속성과도 관련이 있다. 서쪽으로 간 교회는 로마제국의 권력을 상대하게 되었는데, 로마제국의 종교정책은 “로마황제 외에 다른 신을 섬기는 자들은 죽일 것이다.”였다. 이 정책은 정면으로 그리스도인들과 충돌하게 되었고, 이 정책 앞에 오직 믿음 하나로 맞서며, 수많은 주의 자녀들이 죽어갔다. 헤아릴 수 없는 그들의 “순교의 행렬” 끝에 유럽은 복음화되어 갔고, 이들로부터 시작된 교회들은 같은 “순교의 전통”으로 새로운 지역에 교회개척을 하며 역사를 돌파해 왔다. 이들이 새로운 지역에 교회를 개척할 때에는 항상 순교의 역사가 동반되었다.

그러나 동쪽으로 갔던 교회는 전혀 다른 세력을 상대했어야 했다. 그들은 페르시아 제국이었는데, 그들의 종교정책은 로마제국과는 달리 “관용을 기반으로 한 다원주의”였다. 즉, 제국 내의 다양한 종교와 철학 분파들을 인정하되, 자신의 종교를 “절대진리로는 선포하지 말고” 타종교와 철학에도 진리가 있음을 함께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믿는 것은 가능하나, 전도하는 것은 철저하게 금하는 교묘한 정책이었다. 문제는 이 교묘한 술책에 대해, 동쪽으로 이동해갔던 교회들은 이 정책과 하나 둘 타협하기 시작한 것이다. 생존은 보장받으나, 전도와 선교의 영성은 철저하게 거세당한 채, 그 생존을 이어갔다. 우리는 이것을 “역사적 계약관계”라고 부르기로 한다.

이것은 하나의 큰 기류가 되어 동쪽으로 이동한 교회의 전통이 되어갔다. 그리고는 7세기 이후, 이슬람이 중동을 덮게 되었을 때, 사막지역에서 발원한 아랍인의 종교인 이슬람은 막강한 확장력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통치 문명을 가지고 있지는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페르시아의 종교적 전통을 그대로 답습하였고, 이슬람의 통치 하에서 이 “역사적 계약관계”는 지속되었다. 기독교는 이슬람의 통치 하에서 생존이 허용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그들 내부에서만 신앙을 지켜야 할 뿐,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는 주변의 무슬림 불신자들에게는 믿음을 증거하지 말도록 교육받았다. 거의 “기독교족”이 된 채로 1,400년이 흐른 것이다.

역사적 계약관계를 파기하라!

그렇게 생존하고 남은 교회가 바로 이슬람권 내의 기독교회이다. 가장 선교의 진척이 느린 곳인 아랍권 내에 이러한 기독교회들이 아랍어를 모국어로 쓰며 무슬림들 속 한복판에 그루터기와 같이 남아있다. 그러나 그들은 1,400년 동안의 역사적 계약관계로 인해, 정상적인 신앙(불신자에게 표현되지 않는 신앙은 절대로 정상적인 신앙이 될 수 없다!)을 형성해 올 수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중풍병자처럼 사지가 마비되어, 머리로는 알아도 움직일 수가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수많은 지식들을 배워오며, 자신들의 공동체를 다지고 생존하기 위해 힘을 다해 왔다.

비록 중풍병자처럼 팔, 다리가 마비된 상태이지만, 이들은 이슬람의 통치 속에서 살아남아 주었다. 이렇게 남은 아랍권 내의 기독교회들은, 이슬람의 체제 속에서 공존을 보장받는다. 전도만 하지 않는다면, 이들에게는 핍박은 커녕 엄연한 이슬람 세계의 동지로서 당당히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이 무슬림들을 전도하기 시작할 때이다. 그리고 이 일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가까워 온 이 때에 이미 시작되고 있다. 역사적 계약관계를 깨뜨리고 믿음으로 일어나는 새로운 세대가 아랍교회들 가운데에도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랍교회 내의 수많은 종류의 훈련과 사역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 아랍권 무슬림을 향한 전도의 깃발을 높이 치켜세우고, 1,400년 간의 역사적 계약관계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리고 청년들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세대가 이전의 모든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고난을 받는 것과 생존권의 박탈을 각오하며 나서고 있다.

이들이 내민 이 역사적 도전장의 대가는 매우 혹독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것이 1,400년 생존의 근본적 타협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아랍 현지인들이 전도하기 시작했을 때의 경찰들이나 정보부의 반응은, 아랍외부인이 시도하는 전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강력한 대응이었다. 그래서 이들이 대대적으로 아랍권을 전도하기 시작할 때, 이들이 치를 대가는 실로 극도로 잔인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마지막 영광은 바로 역사의 완성과 직결되어 있음 또한 이들이 알기 시작하였다. “이방인의 충만한 수”가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첫 장자 이스라엘은 바로 이 마지막 아랍인들로 선명하게 둘러싸여 있는 것이다. 그리고 아랍인 내부에서부터 이 마지막 아랍을 공략하는 새로운 운동이 시작되고 있다. 그리고 이 운동이 전 아랍권을 덮게 되고, 이사야 19장의 예언과 같이 애굽과 앗수르 함께 경배하는 그 자리에 이스라엘이 함께 주님을 경배하기 시작한다면, 그것이 곧 역사의 마지막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성경이 말한 이 역사의 완성은, 바로 이 아랍인 스스로 이 “역사적 계약관계”를 얼마나 파기시킬 수 있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이 아랍교회들의 운동은 충분히 영향력 있게 일어나고 있다. 곧 우리 눈에 이것을 선명하게 목도하게 될 것이다.

박바울 / 서울대학교대학원 정치외교학 박사 수료, 중동 및 이슬람 관련 연구 다수

[입력 2015-03-11 @ 22:50]

Leave a Reply

Your email address will not be published. Required fields are marked *

*